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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 있는 지도자 양성, 하와이 지역 초기 한인감리교회의 강점

1905년 하와이 감리교 선교부(현 남가주태평양연회 하와이 지방)가 처음 조직되었을 당시 한인 감리교인 수가 605명으로 전체 감리교인 945명 중 64%를 차지했다. 당시 호놀룰루에 하나 있었던 서양인 교회에 64명의 교인이 출석했고, 일본인 교회에 276명의 교인이 있었을 뿐이다. 숫적으로 우세를 점유했던 한인들은 한인공동체뿐만 아니라, 하와이 지역 감리교회 내 여러 행사에 많은 영향을 미쳐왔다.

활발한 활동

당시 감리교회 교우들이 추진했던 일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교회지" 발간과 "남학생 기숙학교" 설립이다.

교인 수에 있어서 큰 비중을 차지한 한인 감리교인들은 하와이 감리교 선교부에서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던 "교회지"를 발간하기 시작했다. 호놀룰루에 하나 밖에 없는 백인 교회는 "교회지"가 필요 없었지만, 여러 섬에 흩어져 있는 한인들은 필요했던 것이다. 한인 교회보다 15년 앞서 세워진 일본인 교회가 "교회지"를 발간 한 것이 언제인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1905년에는 한인 "교회지"와 일본인 "교회지"가 동시에 출판되었다. 처음에는 등사판으로 주일마다 1회 발간되던 『포와 한인교보』가 1906년 5월부터는 한국에서 활자를 들여와 좀 더 격식을 갖춘 "교회지"로 발간되었다. 1910년에는 더 좋은 인쇄기로 매달 700부를 인쇄해 동포들에게 배포했다. 1929년부터는 한영 이중언어로 발간했는데, 최초의 이중언어 "교회지"로 생각된다. 이 "교회지"는 1945년 1월까지 계속 발간됐다. 이것은 하와이 감리교회 출판 역사상 가장 오래 발간된 "교회지"이다.

1905년 12월『포와 한인교보』발행인으로 임명되기 전인 5월에 송헌주는 박윤섭 등 다른 몇 명의 교인들과 함께 와드만(John W. Wadman) 하와이 감리사 집에 모여 교육회를 조직하고 "남학생 기숙학교 설립"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곧 한인들이 2,000달러를 모금하고, 캘리포니아의 해리스 감독 (Bishop Merriman C. Harris)의 주도로 당시 학교 건물이 있었던 부지를 총 1만 8,000달러에 구입해, 1906년 9월부터 '한인 류숙학교'(Korean Boarding School for Boys)를 개교했다. 이 곳에 한인 감리교회도 합류하여 한인 학교와 교회가 같이 있어 흔히 "Korean Compound"라고 알려졌다. 이 학교는 1907년 초 정부의 8학년제 정규 학교로 인정받게 되었다. '한인 류숙학교'(1913년 중앙학원으로 이름이 바뀜)는 1918년까지 운영돼 초기 한인들의 교육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것으로 인해 하와이 지역 감리교회가 일반 교육 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양질의 지도자들

하와이 초기 한인 감리교회들이 이렇게 활발하게 활동을 벌이고 감리교회와 한인공동체에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이유는 양질의 지도자들을 계속해서 양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와이 한인 감리교회 활동에는 평신도 지도자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1913년 3월 12일자 영자 일간지인 "호놀룰루스타불루틴"(Honolulu Star Bulletin)에 보면, 100여 명의 한인교회 지도자들의 특별 집회가 있었다는 기사가 나온다. 이 신문 기사는 한인교회 지도자 훈련에 관한 최초의 영어 기사다. 이때 한인 교회 목회자와 평신도 대표들이 제일 많이 모였다고 한다. 4일 동안의 집회를 통해 참석자들은 성경공부, 감리교회 역사와 교리를 배우고, 서로 유대 관계를 돈독히 했다.

그러나 연회 보고서에는 한인을 비롯한 각 민족의 교회 지도자들의 훈련과 양성 과정에 대한 언급이 없다. 각 교회가 나름대로 전도사(Local Preacher)나 권사(Exhorter)등 평신도 지도자들을 훈련시킨 것으로 보인다. 어떤 과정으로 평신도 지도자들을 훈련했는지 알 수 없으나, 한인 교회들이 1920년대까지 다른 어느 민족보다도 더 많은 전도사와 권사를 배출한 것으로 보아, 이들 양성에 성공했음을 알 수 있다. 하와이 감리교 선교부 자체가 각 민족 평신도 지도자들의 교육과 훈련에 주력하지 못하고 있을 때, 한인들은 계속 지도자들을 배출해 하와이 감리교 성장에 기여했던 것이다.

평신도 지도자들 외에 한인 감리교회에는 이민 초기부터 1920년대까지 계속 한국에서 기초 훈련을 받은 목회자들이 있었다. 한국에서 기초 훈련을 받은 목회자들뿐만 아니라 하와이 교회에서 어떤 형태로든 훈련을 받은 목회자들이 많았다. 1905년에 있었던 연회 때 한인 목회자의 대부분이 목사 교육반에 들어가 공부하고 있었다. 1년 급에는 홍치범, 현순, 김영식, 이경직, 민찬호가 있었다. 윤병구는 1년 급을 전부터 계속하고 있었다. 1909년 3월에 열린 연회에서는 목회자 후보들의 시험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중 현순과 이경직 등은 한국으로 돌아가 1911년에 (감리교) 협성신학교를 제 1회로 졸업하기도 했다. 짐작컨대 호놀룰루에도 그런 교육기관이 있었다면, 더 많은 목회자들이 신학 교육과 목회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목회자가 부족해서 어려움을 겪은 일본인이나 필리핀 감리교회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이렇듯 초기에, 하와이 감리교 선교부가 걱정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한인 목회자 후보가 많았다. 그런데 이것이 1920년대부터 일어날 문제의 씨앗이 되었다. 하와이 감리교 선교부가 목회자 양성에 소홀했기 때문이다.

이중언어를 구사하는 지도자 부족

1920년대를 넘어서면서부터 한국 공동체와 교회에서는 이중언어를 사용할 줄 아는 지도자들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특히 교회에서는 이중언어를 사용하는 목사의 필요성이 날로 커가고 있었다. 미국 교육을 받은 자녀들의 수가 불어나는 1920년대부터 교인들이 미국 교육과 훈련을 받은 목회자를 원하기 시작할 때 하와이 감리교 선교부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문제는 한인 교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일본인 교회나 필리핀 교회도 똑같이 당면한 문제였다. 하와이 감리교 선교부는 언어 문제로 인한 지도자 육성의 어려움을 계속 논의하면서 "전도사 후보자들을 그들의 언어로 훈련할 수 있는 적절한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는 제안도 했으나, 실제로 어떤 방법을 취했는지에 관한 보고는 없다.

1928년 "호놀룰루한인감리교회"(현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 교인들은 미국 교육을 받아 젊은층에게 영어로 설교할 수 있고 동시에 하와이 한인 사회를 대변해 줄 수 있는 목회자를 임명해 달라고 선교부에 요청했다. 완전히 이중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목회자를 원했던 것이다. 이런 조건을 갖춘 목사를 찾는데 4년이 걸렸다. 미네소타의 햄린 대학(Hamline University)을 1926년 졸업하고 1931년에 드류신학대학(Drew Theological Seminary)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변홍기 목사가 호놀룰루의 "호놀룰루한인감리교회"에 부임한 것은 1930년 초였다. 영어와 한어를 완전하게 구사할 수 있는 변 목사는 주일학교를 영어로 인도하였고 주일 예배를 영어와 한어로 인도하면서 설교도 두 나라 말로 하였다.

다행히 "호놀룰루한인감리교회"에서는 미국 교육을 받은 목회자를 계속 임명할 수 있었으나, 다른 한인 교회들에게까지 그런 차례가 돌아가지 않았다. 일본인 교회나 필리핀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하와이 감리교 선교부는 이중언어로 자유자재로 목회 할 수 있는 교역자를 찾는 어려움을 알게 되었고 하와이에서의 목회는 미국에서 출생한 사람이라야 한다고 절실히 깨달았다. 왜냐하면, 동양에서 출생한 성인으로 영어를 잘하는 지도자를 구하기가 아주 힘들었기 때문이다. 언어뿐만 아니라 문화를 이해하는 문제도 쉽게 해결할 수 없었다. 마지막 수단으로 백인 목사가 동양인 목사와 함께 한 교회에서 시무하는 두 목사 제도를 채택하였다. 즉 필리핀이나 일본인 목사가 필리핀이나 일본인 회중을 위해서 목회하고, 한편 영어를 하는 2세들을 위해서는 백인 목사가 목회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중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목회자를 구하기 어려워 두 목사가 한 교회에서 시무하는 번거로움과 이중 경비를 들여야 했던 것이다.

1937년에 한인 2세 정의조(Euicho Chung) 목사가 안수를 받고 하와이 섬의 힐로 교회에 파송됐다. 한인들이 이민 온 지 30년만에 목회자를 배출하게 된 것이다. 정 목사는 4살이 되던 1904년에 부모를 따라 이민 왔고 하와이 대학과 오레곤 대학을 나왔다. 미국 교육을 받은 2세 목사로 한어를 구사하는데는 좀 지장이 있었다. 정 목사는 "호놀룰루한인감리교회"에 온 후로 영어 회중과 한어 회중을 분리하여, 영어 예배와 한어 예배를 따로 보기 시작했다. 예배만 따로 본 것이 아니라 여선교회도 영어와 한어로 나눠 한 교회에 두 나라 말 회중이 뚜렷이 갈라지는 계기가 되었다.

1940년대부터 하와이에 온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 1세들은 대부분 타계하고 2세들은 도시로 진출하여 다른 직업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농장 교회들은 문을 닫게되고 도시 교회들은 다민족 교회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그래서 몇몇 교회를 제외하고는 "일본인"이니 "한국인"이라는 민족 수식어가 붙은 교회 이름이 필요 없게 되었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소수민족 언어에 구애받지 않는 영어 목사로 충분했다.

그러나 "호놀룰루한인감리교회"는 여전히 1세 한인들이 많이 있어 이중언어의 필요성이 있었다. 오랜 기간 이중 언어로 분리되어 갈등을 겪다가 1952년에 이동진(T. Samuel Lee) 목사가 부임함으로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이 목사가 10년 동안의 목회를 끝내고 1962년에 킬로하나교회에 파송됐는데, 이는 하와이에서 한인 목사로는 처음으로 한인 회중이 아닌 다민족 영어 교회에 목회하게 된 것이다. 한인 이민이 시작된 지 60년만의 일이다. 물론 이 목사는 하와이에 오기 전에 워싱턴 주에서 아메리칸 인디안 목회를 한 특유한 목회 경력을 갖고 있다.

이후로도 계속, 하와이 지역 한인공동체 및 감리교회는 이중언어를 구사하는 지도자들의 부족 현상을 겪어 왔다. 100년이 넘는 이민 교회 역사를 가진 하와이 감리교 선교부 뿐만 아니라 아직도 이민이 계속되는 필리핀이나 한인 교회는 이중언어 목회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너무나 잘 알게 되었다. 2000년 말 현재, 한인 감리교인 1,463명은 하와이 전체 감리교인의 21%를 차지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인공동체 뿐만 아니라, 하와이 전체, 아니 미국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이중언어를 구사하는 지도자 양성 시스템이 필요하다. 이중언어 목회자 및 평신도 지도자를 양성하려면 장기적인 계획과 투자가 필요한 것임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이민 1세 교인들이 7, 80여 년 전부터 일깨워 준 이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반드시 찾아야 한다.

글쓴이: 이덕희 성도,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 H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