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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과 민족을 위한 교회: 상항한국인연합감리교회

1900년대 캘리포니아에 불었던 개척 정신의 열기에 싸여 동양 이민이 시작되었다. 중국, 일본, 필리핀에 이어 한국인도 기회의 땅 캘리포니아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정확하게 한국 이민의 미국 본토 입국 및 캘리포니아 정착은 1903년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당시 상항에는 약 25명의 동포들이 안주했다. 이 한국인들은 크게 세 종류로 분류할 수 있었는데 그들은 망명 정치인과 종교인들, 인삼 판로의 개척을 위해 들어온 상인들, 그리고 하와이에 이민 왔다가 본토로 건너 온 사람들이었다.

평탄치 않은 타국살이에 있어서 민족의 긍지와 자신을 유지하고 그들의 생활 개선과 발전을 기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정신적으로 훈련하고 실생활을 지도키 위한 친목 단체 결성이 매우 긴요하다고 느낀 도산 안창호 선생과 그의 동지 8인이 중심이 되어 1903년 9월 5일에 "한인 친목회"를 조직하고, 이와 동시에 그들 동지 중 일부의 성의로 교포들이 모여 기도회를 갖기 시작했다. 이것이 상항한국인연합감리교회 창립의 기초가 되었다.

캘리포니아 스트릿(California Street)

1906년 상항에 대지진이 있었는데, 이 여파로 초기 이민자들은 올데갈데 없는 극심한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때 한국과 한국인을 사랑하는 백인 기독교 형제들의 도움을 얻어 오클랜드에 집을 얻어 같이 하숙을 하기도 했다. 이 무렵 청년 양주삼이 유학차 상항에 도착하여 이 상황을 보게 된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조국과 동포을 위해 봉사하고자 결심한 양주삼은 우선 눈앞에 닥친 교포 구호 사업과 계몽 사업 및 전도 사업에 헌신키로 결심하고 나섰다. 청년 양주삼은 한편으로는 재난을 당한 교포들을 위해 구호금품을 거두어 그들을 돕는 동시에, 또 그들이 새 길을 개척해 나갈 방도를 찾고 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했다.

이러한 그의 열의가 무심치 않아 평소 그를 아는 교포 및 미국 친구들의 도움으로 1906년, 당시 남감리교회(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의 저명한 선교사요 지도자였으며 후일 동양선교사업부 총무가 된 이덕(Dr. C. F. Reid) 목사와 감리사의 협조를 얻어 정식으로 상항에 한국인 감리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뒤이어 양주삼은 담임전도사의 직첩을 맡았고 캘리포니아 스트릿에 자리잡은 예배처에서 그해 11월 18일 감격의 첫 예배를 드렸다. 이 당시 교회 창립에 함께 참가한 신도들 중에는 도산 안창호 선생을 위시하여 양주은, 박윤화, 장나득, 윤혁, 하상옥, 조성학, 송석준, 김성모, 허승원, 임치정, 이위, 장인환 등 정치 망명가, 애국자 및 의사들이 있었다.

담임 전도사 양주삼을 위시한 창립 교인들은 이 교회가 교포들에게 하나님의 복음과 교훈을 전달하는 동시에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위한 애국애족의 정신을 함양할 기회를 주며 신앙에 근거한 불굴의 정신과 신념을 더욱 공고케 하고, 동족들 사이의 애호상조의 실천을 행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전도사와 협력하여 예배처소를 다방면에 이용했다. 예배처의 1층에는 식당을 신설했고 3층은 침식 시설을 갖추었으며 2층은 예배당으로 성별했다. 따라서 교회는 모든 교포들이 함께 숙식하고, 예배드리며, 국사를 논하고,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며, 조국을 위한 헌신, 희생의 정신을 연마하는 교포 사회의 중심이 되었다.

또한 양주삼 전도사는 이 교회에서 야학을 시작하여 미국에서 살아가기 위한 교양을 교포들이 지니도록 하였으며 동시에 "대도(大道)"라는 월간보를 몸소 간행하여 전도, 교양, 고국 및 세계 소식 전달의 도구로 삼으려고 노력했다.

이 교회는 당초부터 조국과 동족에 대한 애국심과 기독교 신앙에 근거한 자주 독립 운동의 터전으로서의 성격을 지녀왔다. 따라서 이러한 성격의 교회를 통하여 애국 행동이 여러모로 진행됨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교우들은 재미 교포의 독립 투쟁 및 협력 친교 단체인 "대한인 국민회"와 실질적인 유기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아울러 애국 운동에 매진하였다. 본 교회 창립 교인인 장인환, 전명운 두 의사의 "스티븐슨 암살사건" 도 이런 맥락에서 이어진 것이다. 그것은 교회의 성격과 활동 중 가장 뛰어났던 영웅적 거사라고 볼 수 있다.

파웰 스트릿(Powell Street)

1930년 5월 파웰 스트리트에 있는 대지에 교회당을 건축하면서, 우리 교회는 또 다른 변혁의 시기를 맞는다. 교회 창립 이래 본 교회는, 예배당을 마련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상항 시내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니며 예배를 드렸다. 교포를 위한 예배, 전도, 교제, 봉사의 기관으로서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항구적인 예배당 마련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당시 담임목사인 이대위 목사와 모든 교우들의 노력과 기도 끝에 미국 감리교회 선교부로부터 파웰 스트릿의 대지(북가주 최초의 미 감리교회의 부지: 교회 건물은 1906년 대지진으로 완전 파괴되고 공터로 남아 있었다.) 금액으로 1만 달러, 건축비로 1만 달러, 합계 2만 달러의 기증을 받았다. 이와 더불어 한인 교포들로부터 1천 5백 달러의 헌금을 거두고 착공을 했다. 1930년 6월 1일에 교회당 봉헌식을 하게 된다. 교회당 건축하는 동안 담임목사의 건강악화로 별세를 하는 아픔도 있었지만, 뒤를 이은 황사선 목사의 노고와 지도력으로 무난히 극복할 수도 있었다.

교회당 봉헌과 함께 이 교회는 상항 지역 교포들을 위한 예배, 증언, 선교, 친교, 기독교 사회 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곳은 한국 교포들의 교회인 동시에 한국 교포들이 모일 수 있는 오직 하나의 공공장소이기도 했다. 한국인의 요구, 한국인의 정당한 주장들, 그리고 우리 교포들의 모든 정당한 행사를 위한 모임의 장소였다. 현실적으로 볼 때 당시의 교포들은 실질상 거의 교인이었고, 또 교포들의 모든 정치적 운동이나 사회 사업은 자연히 교회의 사업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담임자를 비롯한 여러 교우들은 이 교회가 교포 사회를 위한, 나아가서는 조국과 민족을 위한 기관이 되도록 만들기에 전력을 기울였다. 때때로 이 교회는 애국지사들의 웅변과 강연의 자리였고, 많은 유학생들의 연구 발표의 장이었으며 또 조국의 해방과 민족의 자유를 위한 토론과 방침 결정의 장소이기도 했다. 실제적으로 교포들은 중국 본토에서 계속되는 임시 정부의 독립 투쟁을 지원하는 방안을 강구하여 실천에 옮겨 놓았으며, 또 고국의 광복을 염원하는 정치적 훈련장으로 삼았다.

김하태 박사가 담임목사로 재직하고 있을 무렵인 1940년대, 우리 교회는 한국 교포 사회와 한국을 위해 그 애국적인 활동에 박차를 더했다. 이 무렵은 치열한 제 2차 세계대전의 와중이었으며, 아시아에 있어서는 미국과 일본이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었다. 교회 창립 이래 40년 가까이 오직 잃어버린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자유 광복을 염원하며 독립 투쟁을 지원해 온 교포들은 교회를 본거지 삼아 더욱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고, 많은 교포들은 국방경비대에 가담하여 군사 훈련을 받아가며 언제든 조국의 독립 항쟁을 위한 그들의 전투 참가가 요청될 때 이에 호응할 만한 준비를 갖추기에 정진하고 있었다. 교회는 그들을 위한 정신적 육체적 도장이었다.

같은 무렵 미국에 와 대학에서 연구를 하고 있던 소장 학자들은 조국의 독립이 눈 앞에 다가 온 것을 알고 이를 위한 독립 투쟁 대열에 참가키 위해 당시 항일 정보 선전전의 권위였던 "미국의 소리"등 여러 활동에 가세키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모여들었다. 김하태 목사는 다른 학자들과 함께 "미국의 소리" 편집 및 방송에 참여하면서 이와 병행하여 그가 목회하는 상항한국인감리교회가 이러한 여러 형태의 독립 투쟁에 참여한 동포들을 위한 가장 유익한 기관이 되도록 노력했다.

안병주 목사가 목회하던 1950년대는 상항 한인 교포 사회의 성격이 종래와 판이하게 달라지는 시기였다. 우선, 상항에 한국 영사관이 생겨 한미통상의 영사 행정이 있어지고 교포들의 보호육성의 책임을 지게 되었으며, 한국에서 들어오는 학생들의 다수가 상항과 그 주변에서 수학하게 되었다. 또한 미국 각처에서 연구를 끝낸 소장학자 기술자 기사 전문가들의 정착과 함께 교포의 수가 급증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정세 하에 종래 교회에서 50년 가까이 행해지던 국경일 국민의례가 총영사관으로 이첩되었고, 교포 및 학생들의 보호 육성도 공관에서 전적으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총영사관의 행정은 교포를 위한 봉사기관, 국민의 복리를 위한 해외 공관으로서의 기능보다 정부의 권리를 표방하며 교포나 학생들을 통제 감시하는 권력 공관으로서의 비민주적인 기능을 자행하였다는 지적이 많았다. 실제로 총영사관은 이제껏 교포사회의 실질적 핵심이 되어 내려온 교회를 멀리하고 경계하게 되었으며, 급기야는 적대시하게끔 되었다. 당시 자유당 정권의 독재 부정부패가 격화됨을 우려하는 교우들의 수가 늘어가자 총영사관에서는 그런 사람들의 원천지라 할 수 있는 본 교회를 공공연히 비난하게 되었고 자유당 정권의 비판은 곧 대한민국의 주권의 부인을 뜻한다고 단정하여 교회 기능을 간접적으로 방해하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교회와 교포 사회의 중심적 인물들을 공산주의자로 지목하여 비방했고 예배에 참석하려는 교포들과 학생을 실력으로 저지하려 들기까지 했다.

이러한 사태 속에서도, 이 교회의 전통적인 애국적 성격을 살려나가며 교포들을 위한 교회로서의 사명 수행을 위해 안병주 목사와 교회 임원들과 교우 일동은 꾸준한 신앙과 너그러운 사랑으로 교포들을 위한 전도 봉사에 진력하며 극복해 내었다.

1960년대, 미국 정부의 이민 개방 정책에 의하여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의 한인 이민자의 수자가 70년 초엽부터 눈에 뜨이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교포들, 특히 새로 이민 온 교포들의 정착 생활을 돕기 위한 봉사 활동의 필요를 절감하고 본 교회는 73년에 봉사 센터를 연합감리교회의 재정 지원을 얻어 교회 안에 설치해, 75년까지 많은, 대 교민 봉사 활동을 전개했다. 그 두드러진 봉사 종목은 직장 알선, 정부 사회 사업 기관과의 연결, 이민 생활 상담, 자녀들의 학교 입학 수속 및 진학 자문, 노인 생활 정착 주선, 법정 통역 지원 등 다양한 활동을 포함했다. 1973-75년의 프로젝트가 끝나자 본 교회는 그 경험을 토대로 하여 외부의 재정 지원 없이 봉사 활동을 계속하되 교회 사역(Ministry)의 중요한 부분이 되게 하였다. 이 봉사 활동의 경험은 밖으로 발전하여 오늘의 "상항한인센터"로 성장하게 되었다.

1970년대 본국에서 유신 정국이 시작되자 독립 운동의 요람지였던 상항한국인연합감리교에서도 반독재 운동이 교인들 사이에 일기 시작했다. 1973년 5월 교인인 송선근과 김동옥은 교회의 한글타자기를 이용해서 "코리아 저널"을 창간하여 미국 서부에서는 최초로 반 독재의 바람을 일으켰다. 송정률 목사는 한국민주회복통일추진위원회 미주 본부의 고문으로 추대되어 자문에 응했고 은퇴 후에는 그 단체의 의장으로 미국 내 민주 운동의 선봉이 되기도 했다. 차원태 목사도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문제에 비상한 관심을 보여 도시산업선교를 위한 헌금을 거두기도 했으며 5공화국 말에는 교포들과 함께 시내 갈보리감리교회에서 단식 기도회를 이끌었다

쥬다 스트릿(Judah Street)

1994년 5월, 현 3030 Judah Street에 있던 기존 교회 건물을 인수하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급증하는 교인들의 교회 활동과 이세들의 교육, 그리고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위한 투쟁과 교회 운동을 같은 맥락에서 이행 해 온, 우리 교회의 특징을 살리기 위한 터전 마련이었다. 유석종 목사와 교우들의 눈물어린 기도와 헌신을 통해 이런 결실이 있었다.

그후 "Vision 2000"이란 주제 하에 장기 발전 계획을 위한 연구위원회를 조직하고 전도, 양육, 지역사회 봉사/선교, 교회 조직, 재정의 여섯 개 분과 위원회를 만들어 "비전이란 무엇인가" 또는 "우리 교회의 사명은 무엇인가"란 주제 하에 여러 차례에 걸쳐 각 분야 별로 연구하여 발표했다. 계속하여 이 지역에 가장 훌륭한 한인감리교회로 성장해 갈 것을 계획하고 추진하기도 했다.

2001년 8월 부로 김진호 목사가 새로운 사명과 의욕을 가지고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한어와 영어 목회를 담당하여 새로운 혁신과 개혁으로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해 수고하고 있다. 성장을 위한 도전에는 분명히 진통이 필요하다. 또한 그 일은 목회자 혼자서 될 일이 아니다. 교회가 성장하고 주님이 주신 지상 최대의 명령인 세상 끝까지 나가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한데 뭉쳐 헌신과 협력하는 모습이 있어야만 될 것이다.

상항한국인연합감리교회 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박장희. 이 위원회에서 발간한 자료로부터 발췌 요약했다.

글쓴이: 김진호 목사 상항한국인연합감리교회, 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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