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

인간세상으로 이민 오신 하나님

 
미국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한인들을 접하면서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였다. 대부분의 이민자들이 처음 미국에 온 날에 대해서는 비교적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일주일 전에 무엇을 했는지는 잘 생각이 안 나면서도, 10년 혹은 20 년이 넘게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 이민의 첫날에 대해서는 날짜, 기후, 느낌 등을 잘 기억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 경험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한국에서 영어 공부를 많이 하고 왔건, 미국영화를 많이 봤건, 인터넷으로 상세히 조사를 했건, 이런 것과는 상관없이, 언어, 문화, 환경의 격차는 피부로 금방 느껴지기 마련이다.

이민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뿌리가 잘리는 아픔을 경험하는 것이다. 갑자기 소수인종이라는 낯선 딱지가 붙고, 매일 편히 먹던 김치도 어디를 가느냐에 따라서 냄새가 나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어 자제하기도 하고, 영어를 잘 알아듣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바보 취급을 받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는 죄지은 것도 없는데 "불법"이라는 이름 아래 불안한 날들을 보내기도 한다. 물론 새로운 나라에서 새롭게 배우는 점도 정말 많고, 그렇기에 삶이 더 활력이 있기도 하지만, 이민자로서 겪게 되는 상실감, 차별대우, 혹은 불이익은 삶을 지치고 힘들게 만든다.

이민자로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며, 미국의 한인 이민신학자로 새로운 신학을 구축하는데 큰 역할을 한 이중영 목사를 생각하게 된다. 그는 성육신을 하나님께서 하늘나라에서 이 세상으로 이민 오신 것과 비교할 수 있다고 했다 (Marginality: The Key to Multicultural Theology.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5).예수는 이민자로서 용기 있는 삶을 살았고, 또 오늘날의 이민자들의 모습에서 예수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생각은 독일의 신학자 칼 바르트가 교회 교의학에서 성육신을 하나님이 멀고 먼 세상으로 여행을 간 것으로 표현한 것과 비슷하지만, 이민의 경험은 단순한 여행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예수의 탄생을 하나님이 이국땅으로 이주한 이민의 시작이라고 본다면, 크리스마스는 인간세상으로 이민 오신 하나님을 환영하고 축하하는 큰 잔치이다. 매년 크리스마스 때마다 우리는 다시금 마음의 문을 열어서, 우리와 생각, 신학, 습관, 문화, 역사 등이 다른 사람들, 버림받고 학대받는 이들, 연약하고 나약하게 보이는 자들을 통해 이 세상으로 오시는 "이민자" 예수를 거듭 발견해야 한다.

세상은 높고, 위대하고, 권력 있는 곳에서 하나님을 찾고자 한다. 하나님이 인간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리라 막연히 기대하기도 한다. 그러나 크리스마스는 낮고, 볼품없고, 힘이 없어 보이는 곳에서 새롭게 아기 예수를 보게 한다.

예수의 탄생으로 인해 도저히 섞일 수 없고 혼동될 수 없다고 생각되었던 신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이 연결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서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주었다. 절대 전능한 초월자로서 시공을 넘어 우주와 역사를 관장하는 분으로 여겨졌던 하나님이 인간으로 태어나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을 뿐 아니라, 인간의 나약함까지도 내재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원하신다면 다른 모습으로 오실 수도 있으셨을 텐데, 왜 굳이 연약하기 짝이 없는 어린아이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인간이 겪는 성장과정을 거치고 철저하게 인간의 삶, 그것도 평범한 삶이 아닌, 이민자와 같은 삶을 살고자 하셨을까?

그것은 척박하고 힘겨울 때가 많은 우리 삶에 힘과 용기와 희망을 주기 위해서 일 것이다. 이중영 목사의 말처럼 하나님의 이민과 우리의 이민의 다른 점은 우리 대부분이 자신의 삶의 향상을 목표로 이민 온 것에 비해, 하나님은 세상을 구하기 위해 인간 땅으로 이민을 오셨다는 것이다. 가장 어렵고, 무시 받고, 힘겹고, 가난한 삶의 현장으로 투신하여 사랑의 불을 태우신 것이다.

우리의 이민도 단순히 우리 자신의 목표 달성만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을 더욱 폭넓게 나누는 도전적인 기회로 받아들인다면 좀 더 의미 있는 삶이 되리라고 믿는다. 우리가 이민사회에서 겪는 모든 어려움들이 예수가 이미 다 경험한 것이라 생각하면 어깨의 짐이 조금 가볍게 느껴질 것이다. 이민기독인으로서, 이민교회로서, 우리가 미국사회에, 그리고 점점 더 가까워지는 지구촌에 공헌할 수 있는 일들이 참 많이 있다.

올해는 이민자의 존재로 인해서 더욱 온정과 사랑이 넘치는 크리스마스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아픔의 경험이 있기에, 다른 아픈 이들을 이해하고, 차별대우를 받은 경험이 있기에 약한 이들을 더 살펴주고, 상실의 경험이 있기에 다른 이들의 슬픔을 감싸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 예수의 정신적 후예들로써, 자긍심과 자부심을 가지고 오늘 우리가 이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자.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 이 세상으로 이민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라고 할 수 있듯이, 우리의 존재로 인해서 어느 누군가가 하나님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삶의 보람을 크게 느낄 것이다.

이번 크리스마스 때에는 예수의 탄생을 통한 하나님의 이민을 크게 축하해드리자. 그리고 우리를 이민여정으로 불러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자.

글쓴이: 정화영 목사, Prince of Peace UMC IL
올린날: 2008년 12월 15일 연합감리교회 공보부 T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