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눌루루 다운타운에서 북서쪽으로 자동차를 타고 약 55마일 속도로, 20분 가량 달리면 호놀루루 공항과, 그 옆으로, 2차 세계 대전시 일본의 공격을 받았던 유명한 진주만을 만나게 된다. 진주만을 지나,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약 9마일 정도를 더 달리면, 태평양 연안에서 가장 큰 미 육군 기지가 주둔하고 있는 스코휠드 배랙(Schofield Barrack)이 있는데, 그 옆에 와히아와(Wahiawa)라는 조용한 시골 타운이 자리잡고 있다. 이 동네는 오하우 섬의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섬의 중앙부에서 약간 북서쪽으로 치우쳐 위치해 있다. 이곳이 바로 "올리브 연합감리교회"가 있는 곳이다.
1900년대 초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농부들과, 스코휠드에 주둔하고 있는 40,000여 명의 군인들을 상대로 세탁소, 양복점, 구두수선, 그리고 잡화상을 하는 사람들이 이곳 와히아와 도시에 모여 살았다. 기록에 따르면 1920년대에 이 도시에만 1,000여 명이 넘는 한인들이 거주했다고 한다. 당시 미국을 통 털어 가장 큰 한인 타운인 셈이다. 와히아와를 중심으로 북쪽 방면으로 11마일을 달려가면, 북쪽 해안에 자리잡고 있는 아름다운 도시 할레이바(Haleiwa)라 불리는 타운을 만나게 된다. 이 두 도시 사이에 드넓은 농장이 펼쳐져 있는데, 이곳에서 우리 조상들이 삶의 터전을 삼았다. 지금은 경제적인 이유로 사탕수수 경작은 사라지고, 모두 파인애플 농장으로 탈바꿈되어 있다.
초창기 한인 교회 중 하나
할레이바에서 해변을 따라 서쪽 방면으로 "와이알루아 농장 지대"가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오하우 섬의 최북단 서쪽 지역에 해당한다. 이곳이 바로 1903년 1월 13일 최초의 한인 이민자들이 역사적인 첫 발걸음을 내디딘 곳이다. 첫 한인 이민자들이 배를 타고 하와이에 올 때, 배 안에서부터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그들은 이곳 정착지에 도착해서도 계속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을 것이다. 미국인들에게 "플리머쓰(Plymouth)"가 주는 것만큼이나, 이곳이 우리 한인들에게 특히 기독교인들에게 주는 의미가 크다.
이후 "와이알루아 농장 지대"로부터 각 곳으로 노동자들이 배치되면서, 한인 공동체를 위한 소모임 형식의 예배가 확산되기 시작한다. 1906년의 기록을 보면, 감리교회에 의해 하와이 군도 전체에 30군데의 "한인 전도관(혹은 예배 처소)"(Mission Station)과 20개의 "워십 스테이션(혹은 예배 처소)"(Worship Station)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모임이 나중에 교회로 발전하게 되었다.
"와이알루아 농장 지대"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 입지적으로 유리한 조건 때문에 당시 한인들이 가장 많이 살았던 도시, 와히아와에도 이런 형식의 모임이 있었다. 그러다가, 1907년 9월, 46명의 교인들이 모여 공식적으로 "와히아와 한인감리교회"를 출범시키게 된다. 이것이 현 "올리브 연합감리교회"의 모체이다.
"와히아와 한인감리교회"의 창립 멤버였던 고 유복선 성도의 증언에 의하면, "와히아와 한인감리교회"가 출범하기 전, 당시 한국 학교 역할을 했던 "배영의숙"이라 이름하는 곳에서 주일에 소그룹 형식의 모임을 가졌다고 한다. 후에 와히아와 초등학교 교실을 빌어 기도회를 가지다가, 성도들의 숫자가 증가하자, 1907년 46명의 성도들이 뜻을 모아, 공식적으로 "와히아와 한인감리교회"로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이렇듯, 문서상 1907년 9월 교회가 공식 출범하였다고 하지만, "와히아와 한인감리교회"는 그 역사를 1903년 이후, 초기 이민자들이 와히아와에 정착하면서 바로 시작된 최초의 한인 이민 교회의 하나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1920년대 당시 이미 와히아와에 한인 2세 치과 의사, 혹은 교사 등이 배출되어 활약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중에 강영각(Donald Kang)이란 분은 어려서 부모를 따라 이민을 와 캘리포니아에 있는 포모나(Pomona) 대학을 졸업한 후,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여름 방학 기간 동안에는 와히아와에서 영어, 한국어 웅변대회, 남ㅑ녀 배구 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약 200여 명의 한인 젊은이들이 함께 모여 우리의 문화를 배우고 사귀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1920년부터는 영자신문 "영 코리언"(The Young Korean)을 발행하여 2세들에게 코리안 아메리칸으로서의 자의식을 고취하기도 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이 바로 "와히아와 한인감리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독립 운동 지원
초창기 고난의 역사를 넘어 1917년 3월 30일에, "와히아와 한인교회"는 이전하여(336 Olive Ave.) 최초로 교회 땅과 건물을 소유하게 된다. 당시의 유력한 실업가 퍼씨 폰드(Percy Pond)씨가 교회에 기증한 것이다. 이를 발판으로 교회는 발전을 거듭하여, 1931년 최초의 아름다운 성전을 건축하게 된다. 당시 담임목사는 이 교회 역사상 가장 이 교회에 오래 시무 하셨던 안창호 목사(1927년-1945년)였다.
안창호 목사가 시무 할 당시 특기할 사항은 당시에 담임목사를 중심으로 온 교우들이 매달 상해 임시 정부의 주석으로 있던 김구 선생 앞으로 매달 얼마의 돈을 보내어, 독립 운동을 지원한 것이다. 그로 인해 김구 선생으로부터 안창호 목사를 비롯한 여덟 명의 교회 지도자들이 한독당 간부로 인정되었다. 최근 미 연방정부 문서국에서 발견된 편지를 보면 1941년 김구 선생은 임성우와 안창호 목사에게 편지를 보낸 사실이 있다. 내용은, 긴히 쓸 일이 있으니 4,000달러를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전쟁 중이라 이 편지가 인도, 북 아프리카를 거치고도, 미국 본토를 지나서야 하와이에 도착하게 된다. 그동안 미, 영 정보국의 검열을 받게된다. 이 과정에서 편지가 번역되고, 그 사본이 미연방 문서국에 보관되게 된 것이다. 이를 근거로 볼 때, 당시 하와이 한독당 지부의 세력은 비록 작았으나, 우리나라 독립 운동에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로 인해 2001년 뒤늦게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그 공이 인정되어, 안창호 목사와 당시의 교인 김현구 씨가 대전 국립묘지 독립 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당시 "와히아와 한인감리교회" 교인이었던 유동면, 장금환, 권도인, 이모세 등도 국가 보훈처의 주선으로 2002년 가을 무렵 국립묘지에 안장될 예정에 있다. 이 일이 "와히아와 한인감리교회"의 역사를 빛내는 대목이다.
위기의 시기를 다문화/다인종 목회로 극복
안창호 목사가 1951년 다른 교회로 이임을 한 후, "와히아와 한인감리교회"는 존폐의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1945년부터 1951년까지 전후 복구 기간 동안 교인 수도 현저히 줄고, 교회 활동이 위축되어 담임자를 모시지 못하게 된다. 순회 선교사들이 주일에만 들러 예배를 인도하는 어려운 시절을 겪게 된다. 이후, 1952년부터 1959년까지 다시 정의조 그리고 임춘호 목사가 교회에 시무하지만, 또다시 59년에서 61년까지 임시 순회 설교자들이 교회를 돌보게 된다.
그러다가 다행히 1961년 김성회 목사께서 담임자로 부임하면서 "와히아와 한인감리교회"는 중흥의 초석을 다지게 된다. 한인 1세들의 수가 줄고 영어권 회중이 늘어나자, 1962년 4월 교회는 교인 총회를 열어, 지역 사회의 모든 인종에게 문호를 개방하기로 결정하고, 다문화 목회를 시작한다. 이때 "와히아와 한인감리교회"에서 "올리브 연합감리교회"로 그 이름을 바꾸게 된 것이다. 동시에 교회는 다문화 목회로 그 방향을 전환하여 오늘의 발전을 이루는 틀을 다지게 된다.
영어 예배가 시작된 지 1년도 안되어 영어 회중이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여, 교회를 새롭게 확장할 필요가 생긴다. 현재 교회가 자리하고 있는 108 California Street에 국내 선교부의 지원을 받아 49,900 스퀘어 피트의 부지를 구입한다. 새 성전을 짓기 시작하여 1964년 9월 13일 아름다운 현재의 성전을 봉헌하게 되었다.
이후 1969년 사모안들을 대상으로 하는 목회가 시작되어 교회는 본격적인 다문화 목회의 틀을 다지게 된다. 아울러 1970년부터 지역사회의 봉사 차원으로 유치원을 시작하여 오늘까지 30년이 넘게 지역 사회를 위한 유치원이 운영되고 있다.
안디옥 교회를 모델로 하여
현재 매주 90명에서 100여 명의 한어 회중, 60명에서 70명의 영어 회중, 그리고 20여 명의 사모안 등, 세 개의 언어 회중이 함께 "올리브 연합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하고 있다. 어디에서도 쉽게 찾을 수 없는 다문화 목회가 이상적으로 잘 조화를 이루고 진행되고 있는 것이 우리 교회의 큰 자랑 중에 하나이다. 특별히 영어 회중에는 한인 2-3세, 백인, 흑인, 일본인, 필리핀인, 사모안, 중국인 배경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있다. 한어부 구성원 중 많은 분들이 국제 결혼을 한 분들로서 다문화 목회에 쉽게 적응하여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올리브 연합감리교회"의 또 다른 장점은 헌신된 많은 평신도 지도자들이 교회를 정성을 다해 섬기고 있는 것이다. 이로서 교회에서 지불되는 인건비를 최소화하고, 교회 예산의 20% 가까이를 선교비로 지출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 건물이 자체 건물이며, 훌륭한 목회자 사택이 마련되어 있어, 건물 유지비 외에 다른 렌트비가 들지 않기에 가능하다. 또, 이중언어를 사용하는 목회자를 중심으로 각 부서마다 평신도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은사를 최대로 개발하여 헌신하기에 가능하다. 교회 전체 예산 중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상대적으로 작으니 이런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교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영성 훈련 프로그램으로 월요일에 '영어 지도자 성경공부,' 화요일 아침 '한어부 성경공부,' '수요 예배,' '금요 저녁 지도자 성경공부' 등이 있다. 그리고 한어부인 경우 매주, 혹은 격주로 속회원들이 모임을 갖는다. 이를 위해 매 월 속회 지도자 훈련이 목사관에서 친교와 함께 이루어지고 있다.
또 하나 이 교회가 갖고 있는 장점은 평신도 지도자 개발에 역점을 둔다는 것이다. 지도자 훈련을 위한 예산을 충분히 확보해 놓고, 각종 영적인 컨퍼런스에 참여 혹은 개최하는 것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특별히, 정영희 담임목사는 스코휠드에 배치되어 오는 군인 가족들을 복음화하여, 3-4년을 주기로 세계 평신도 선교사로 파송하는 목회 계획을 세우고 시행하고 있다.
2002년 8월 15일부터 총 공사비 50만 불을 들여, 3,000스퀘어 피트에 달하는 교육관 공사를 시작하여 진행 중에 있다. 교육과 영성 훈련에 역점을 두고 있는 목회 방향에 따라, 교육관이 완성되면, 한글 학교와 주중 노인들을 위한 각종 프로그램을 열어 노인 목회를 강화할 준비를 하고 있다. 교육관 건축이 끝나는 내년부터 날이 갈수록 각박해 지는 현대인들이 주일 예배를 통하여 그들의 영혼과 육신에 쌓인 피로를 풀고 새로운 활력을 얻도록, 교회의 조경을 심고 다듬어 하와이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의 하나로 발전시켜 나갈 예정에 있다.
감사한 것은 지난 3년 간, 불황이 계속되는 상황에서도 매년 교회의 예산을 25% 이상 초과 달성하였고, 작년의 경우, 건축 헌금을 합하면 85%의 예산을 초과 달성하는 경제적인 축복을 받았다.
2003년 1월부터, 이민 교회 역사에 밝은 한 분을 선정하여 "올리브 연합감리교회"를 중심으로 한인 이민 역사책을 집필할 계획을 하고 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우리가 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일을 책임지신다.': 우리 "올리브 연합감리교회"의 온 교우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다. 이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오늘도 우리는 삶의 터전에서 살아가고 있다. '사도행전 11장에 나온 안디옥 교회를 모델로 다 문화, 다 인종이 함께 모여 성서적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동시에, 선교의 공동체가 되자': 우리들이 꿈꾸고 있는 비전이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최선을 다해 교회 생활하고 있다. 오늘도 우리는 이 축복된 교회 공동체의 한 일원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글쓴이: 정영희 목사, 올리브연합감리교회 H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