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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最古)에서 최고(最高)의 교회로 거듭나기, LA연합감리교회

태평양의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있는 로스앤젤레스 한인연합감리교회의 아름다운 부지는 로스엔젤레스 국제 공항에서 코리아 타운(Korea Town)으로 향하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어, 공항에서 5분 거리, 코리아 타운에서 20분 거리이다. 코리아 타운에서는 약간 먼 듯 하지만 405번 프리웨이(Feeway)가 교회 바로 옆을 지나가고 있어, 사실 한인 컴뮤너티(Community)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로스엔젤레스에 거주하는 교민들에게 '로스앤젤레스 한인연합감리교회'라는 이름은 생소하지만, '로벗슨 교회'라는 이름은 익숙하다. 초창기에는 '나성한인감리교회'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나, 1968년 로벗슨 블루버드(Robertson Blvd.)로 이전하면서 '로벗슨 한인감리교회'로 불렀고, 1989년 로스엔젤레스 공항 부근으로 옮기면서 '로스앤젤레스 한인연합감리교회'로 다시 이름을 바꾸었다.

로스앤젤레스 한인연합감리교회라는 이름을 소개하기 위해 제일 먼저 언급해야 할 것은 "본토 최초의 교회"라는 수식어일 것이다. 로스앤젤레스 한인연합감리교회의 설립자는 한국 호남 지방에 의료 선교사로 파송되었던 미국인 프랜시스 셔먼(Francis Sherman) 여사이다. 셔먼 여사는 의사인 남편과 함께 한국에서 의료 선교를 하다가 안식년인 1900년에 미국으로 돌아왔는데, 남편은 한국에서 걸린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이후 두 아들과 함께 로스엔젤레스에서 지낸 셔먼 여사는 1904년을 맞게 되는데, 그때는 마침 하와이 사탕수수 근로자들이 열악한 농장을 떠나 미 본토로 많이 건너오던 때였다.

하와이에서 건너온 한인들은 로스엔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새크라멘토, 시애틀, 그리고 덴버 등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다. 그들이 찾을 수 있는 일자리는 식당, 철로, 공사터 등 임금도 적고 비참한 직업이었다. 로스엔젤레스에서 이들의 어려운 생활을 목격한 셔먼 여사는 "남감리교회" 선교부의 도움을 받아 감리교회 학교였던 지금의 USC(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남가주대학교) 부근의 매그놀리아(Magnolia) 거리에 집을 빌려 이들을 위한 기숙사를 세우고 밤에는 성경과 영어를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일요일에 한국어로 공공 장소에서 첫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바로 교회 창립일인 1904년 3월 11일이다.

셔먼 여사가 한인을 위한 기숙사를 남가주대학교 인근에 정한 이유는 당시 한인 유학생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셔먼 여사는 한국 선교를 위해서 청년 기독교 지도자들을 양성해야 한다고 믿어, 그녀의 모 교회 청년회를 통해 여비를 얻고, 그 당시 개화 사상에 심취해 있던 청년 신흥우의 미국 유학을 주선해 주었다. 그래서 1903년 미국에 온 남가주대학교 유학생이었던 신흥우(귀국 후 배제 학당 한국인 초대 교장이 됨), 김인제 등을 훈련시켜 초창기 교회의 제반 업무를 담당케 함으로, 셔먼 여사가 교회를 떠난 후에도 한인 교회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했다. 따라서 이 교회에는 자연히 유학생들이 많이 모이게 되었다.

교회 창립 6년 후인 1910년 당시 하와이의 최초 한인 교회인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현 명칭)의 2대 담임자였던 민찬호 전도사가 로스엔젤레스로 유학을 왔다가 본 교회를 맡게 되었다. 그때 감리교회의 지원 중단, 이민 중단, 그리고 인종 차별로 인한 한인 사회의 부진 등으로 인해 교회가 많은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게 된다. 당시 로스엔젤레스에 한인장로교회가 창설되었지만 그곳도 역시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두 교회는 민찬호 전도사를 중심으로 합하는 길 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교단적 배경보다는 인간 교육과 민족 교육이 중요하고 이민 생활이 시급했던 시기였기에, 장소가 넓은 장로교회에서 민찬호 전도사를 초빙하는 형식으로 통합했다. 많은 감리교인들이 민찬호 전도사를 따라 장로교회로 가서 예배를 드렸다. 이후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합동해서 어려운 시기들을 잘 극복해 나갈 수 있었지만, 1924년 이후 '동지회 교회'가 설립되자, 장로교회, 감리교회, 동지회의 교회 등 세 교회로 나누어지는 아픔도 있었다.

그러던 중 상황이 호전된 1930년에 감리교회 교우들이 자진해서 감리교회 교단 본부 선교부에 연락하고, 황사용 목사를 3대 담임목사로 모시면서, 다시 원래대로의 감리교회 이름으로 교회 역활을 재개했다. 그후 1939년 감리교단이 미국 내 동양인 선교를 위해 설립한 "캘리포니아 동양선교부"의 회원이 됨으로서 본 교회가 감리교회로서의 본격적 궤도에 오르게 된다. 이때 교회 재적 인원이 125명(평균 출석 75명)으로 당시로서는 상당히 부흥한 것이다.

황사용 목사 이후 이진묵 목사, 장기형 목사의 신실한 목회를 통하여 교회는 정상대로 부흥을 계속했다. 1947년 당시 남가주대학교에서 수학 중이던 김하태 목사가 부임할 즈음에는 점점 늘어나는 교인으로 자체 교회의 필요성을 감지하고, 교단의 도움과 교인들의 바자회 기금으로 처음으로 자체 건물(Orchard & 29th가)을 구입함으로 "본토 최초의 한인 교회"로서의 역사성을 본격적으로 한인 사회에 알리게 된다. 그리고 바로 당년에 빚을 청산하고 봉헌 예배를 드렸다. 김하태 목사는 남가주대학교에서 종교학으로 박사학위(Ph. D.)를 받고, 2년 간의 이곳 목회를 마감한 후, 샌프란시스코로 떠나게 된다.

1949년에 오창희 목사님의 활발한 지도력 하에 교회는 한 가족처럼 뭉쳤고, 특히 청년 운동이 왕성하게 일어났다. 올림픽(Olympic) 가를 중심으로 한인 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하는 50년대와 60년대에는 교회의 맨 앞자리를, 당시 남가주에서 최고로 존경받던 안창호 선생 부인 김혜련 여사와 김호 선생 부부 등, 많은 한인 사회 지도자들이 지켜주면서 로스앤젤레스 한인연합감리교회의 위상을 높였다.

1953년 6월에는 프린스턴(Princeton) 신학교에서 공부를 마친 젊은 교역자 최영용 목사가 담임으로 부임했다. 최영용 목사는 1981년 은퇴할 때까지 28년 동안 교회를 차분하게 지도하여 명실공히 미주 한인 교회의 모교회로서의 면모를 갖추도록 이끌었다. 1958년 교회는 협소해지고 낙후되어, 늘어나는 교인들을 다 수용할 수 없게되자 워싱턴(Washington)가와 버지니아(Virginia)가에 있는 대지를 매입하고 2년 동안 건축하여 1960년 교회를 봉헌하게 된다.

그러나 이 교회도 자리가 곧 부족하게 되자, 로벗슨 가에 있는 미국인 감리교회로 이전하게 된다. 그 교회는 한국의 초대 선교사였던 아펜젤러(Rev. Henry G. Appenzeller)의 아들이 담임한 적도 있었던 한국과 역사적인 인연이 있는 교회였다. 1973년에 교회의 공식 명칭을 '로벗슨 교회'로 개칭했다. 70여년 간 유일한 감리교회로 자리매김을 해왔던 로벗슨 교회는 한인 교포들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교포와 유학생을 위한 각가지 봉사와 교포들을 위한 정신적, 영적 안식처를 제공하였다.

특히 최영용 목사는 교포들의 늘어나는 이민 문제를 돕기 위하여 이민국에서 파트 타임으로 일을 하면서 많은 이민자들을 도와 주었는데, 당시 이국의 외로움과 어려움 속에서 공부하던 많은 유학생들이 우리 교회를 통하여 신앙과 용기를 얻고 이제는 교회의 중진이 되었다.

19년 동안 하와이에 있는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현 명칭)를 섬겼던 박대희 목사는 1981년에 최 목사 후임으로 파송 받았다. 그는 이민 목회의 많은 경륜을 통해 본 교회를 크게 부흥시키고 9년 간의 성공적인 사역 후에 1990년 은퇴했다. 박 목사의 은퇴를 앞둔 1980년대 말 교회는 한번 더 방향 전환을 한다. '로벗슨 교회'에도 수용 능력에 한계에 부딪치게 되어, 주차장 문제가 심각해지고, 2세 교육을 위한 교육관 문제가 대두되자, 오랜 시간에 걸친 논의 끝에 현재 위치로 이전하게 되었다.

그 이후 서부 지역 최초의 한인 지방 감리사로 5년간 롱비치(Long Beach) 지방에서 사역하셨던 박진성 감리사가 담임목사로 부임하였으나 부임한지 6개월 만에 지병으로 돌아가시는 가슴 아픈 일이 있었다. 그 후임으로 박진성 목사의 동생인 박준성 목사가 부임했다. 박준성 목사는 5년 간 교회의 영적 성장과 선교를 위해 많은 노력하다가 러시아 선교를 위해 1996년 교회를 떠나셨다.

"서부 한인선교구"의 초대 감리사로 8년 간(1988-96) 사역하신 후 1996년부터 본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김광진 목사는 "우리 교회의 특징은 유학생 출신의 올드 타이머로 40년 이상 이 교회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라며 "로스엔젤레스에서 '최초'라는 수식어를 가진 사람 중에는 우리 교인이 대부분입니다. 초기의 한인 변호사인 민병수 씨와 서동성 씨를 비롯해 올림픽 메달리스트 새미 리와 그의 누이이며 교육가인 매리손 여사, 도산 안창호 선생의 딸인 수잔 안씨와 막내인 랄프 안씨가 있습니다. 안창호 선생의 자녀를 비롯하여 50년 이상 우리 교회를 지켜온 한인 교계의 산 증인들이 실질적인 우리 교회의 귀중한 역사의 산 증인"이라고 말한다.

또한 지금 생존해 계시는 교역자 가운데 우리 교회를 거쳐 가신 훌륭한 여러 교역자들을 소개한다. 한어부에는 은퇴하신 김하태 목사, 박대희 목사, 김거정 목사, 이처권 목사와 미국 교회와 한인 교회에서 현역으로 일하시는 김웅민 목사, 김낙인 목사, 신영각 목사, 전우영 목사, 송종남 목사, 그리고 예일 신학교 교수인 이경식 목사, 한국 협성신학교 교수인 서영석 목사 등이 우리 교회에서 사역했었다. 영어권 출신으로는 톰최(Tom Choi) 목사, 켄서(Ken Suhr) 목사가 본 교회에서 성장한 2세 목회자들인데 그들 모두는 우리 교회 역사의 산 증인이요, 100년 역사의 아름다운 열매들이다.

또한 본 교회에는 영어권 후손들이 많기 때문에 60년대 말까지 임원 회의를 영어로 진행했고, 또 1995년에는 영어를 쓰는 2세들에게 재정적 독립과 함께 실질적인 목회 독립을 허락한 최초의 교회이기도 했다. 부임한 이후 지금까지 교회를 활기차게 이끌어가고 있는 김광진 목사는 로스앤젤레스 한인연합감리교회의 특징을

1. 100년의 역사 가운데 교회 분란이 없었던 "은혜로운 교회"
2. 1, 2, 3세가 어울어진 "화목하고 균형 잡힌 교회"
3. 한인 최초의 역사성 속에 교민 사회를 주도하는 "많은 지도자를 배출한 교회"
4. 12년 동안 멕시코 지교회 설립 지원 및 세계 여러 곳에 선교의 손길을 펴는 "선교하는 교회"
5. 대학생들과 젊은층들이 크게 활성화되어 "고목에 새순이 피는 교회"
6. 100주년(2004년)을 통해 차세대를 위한 교육 강화로 "교육에 힘쓰는 교회"
7. 매월 정기 발행물 "한마음 한사랑" 및 웹사이트 개설 등을 통하여 새로운 미디어로 "전도하는 교회"로 요약해서 말한다. 그 중에서 "한인 교회로는 자랑스럽게 1세와 2세, 그리고 3세가 비슷한 인구분포로 공존해 가는 교회로 앞으로 21세기의 모델이 되는 교회가 되도록 이끌고 싶다"고 꿈을 밝힌다.

현재 매주 300여 명의 한어 회중, 100여 명의 영어 회중이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데, 영적 성장을 위한 다양한 영성 훈련 프로그램(중보 기도회, 새벽 기도회, 뜨레스 디아스 영성 훈련, 찬양과 기도의 훈련, 연령별 성경 공부, 시리즈 성경 연구 모임)을 통해 훈련받고 있다.

넓은 주차장과 어린이들이 마음대로 뛰어 놀 수 있는 잔디와 놀이터, 자체 건물인 아름다운 부지에서 생동감 있는 예배와 영성 훈련을 인도하는 10여 명의 헌신된 한어부, 영어부의 교역자들은 깊은 신뢰감으로 서로를 격려하며 창조적인 목회를 하고 있다.

2001년에는 교회 소채플과 교육관을 대대적으로 수리해서 차세대 교육을 위한 준비를 마무리 했다. 동시에 세계 선교를 위해 18개 소그룹에서 스스로 선교지를 정하고, 기도하고, 후원하고 있다. 선교부는 멕시코 지교회 뿐 아니라, 몽골, 중국 등 아시아 선교 등에도 주력하고 있다.

불경기 중에도 특히 2002년에는 연회 부담금을 100% 완납하면서 연합감리교회의 연대 정신(Connection Spirit)을 조용히 보여 주기도 했다.

이민 100주년을 맞는 2004년을 맞아 교회 차원에서 차분히 실속 있는 기념 행사를 준비 중이다. 한영 두 권으로 된 교회 1백년사 출판{현재, 클레어몬트신학교 교수인 김신행 목사가 한어로, 본 교회 출신이면서 현재 맥케나(Mckenna College) 역사학 교수인 유대빗 박사가 영어로 쓰고 있다}을 비롯하여, 나성 인근 100주년 기념 지교회 설립, 장학 재단 설립, 교회 앞에 100주년 기념탑 건립, 국내외 선교 프로젝트 및 미래를 위한 목회 모델 세미나 등등을 준비하고 있다. 이미 50여 만 불의 예산을 확보한 상태이다.

공간적으로는 한인 사회와 약간 멀어져 있는 느낌은 있지만, 오히려 한인 사회에 더 깊이 뿌리 내린 가운데 독특한 교회 색깔로 이민 교회의 어머니 교회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는 로스앤젤레스 한인연합감리교회는 본토 "최고(最古)의 교회"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제 100주년을 준비하면서 "최고(最高)의 교회"로 거듭나서, 영적으로 교계와 이민 사회를 인도한다는 비전을 꿈꾸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온 성도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

글쓴이: 박재호 부목사 로스앤젤레스 한인연합감리교회, 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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